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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익은 마음에게 한 입02. 어른으로 갑니다 - 김밥




이미 어른인데 어른인 것 같은 이 기분 


퇴근 후, 광화문 디타워로 갔다. 요 몇 주 흑맥주 노래를 부르는 내게, 자칭 '먹사남'-먹기 위해 사는 남자-이 흑맥주 잘하는 곳을 알려주겠다며 나를 그리로 소환했다(맥주 노래는 불렀지만, 1년간 내가 마시는 술의 총량이 맥주 오백 씨씨 한잔이 될까 말 까다. 그렇다. 난 술을 못한다).

디타워에는 마주 앉은 연인들이며 친구들이 그득했다. 평소보다는 덜 붐볐겠지만, 코로나의 낌새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상적인 저녁의 풍경이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흑맥주 제일 작은 잔을 손에 쥐고서, 하루의 수고를 털어내는 그 다정한 장면 속에 함께 하고 있다니. 게다가  여기는 무려 '타워'아닌가! 3층에 앉아있긴 했지만. 나지막이 감탄했다.


"오! 이러고 있으니까 어른인 거 같아요!"

맞은편에 마주 앉은 먹사남이 분명한 어른의 얼굴로 말을 받았다.

"우리 어른인데요."

"아... 그러니까 매일 퇴근하면 집에 가서 설거지나 빨래하는데, 여기 있으니까 어른 같다고요."

"그것도 어른이죠. 설거지랑 빨래."

아, 듣고 보니 그러네. 이미 어른이면서 새삼 어른된 기분으로 상큼하고 쌉싸래한 풀향, 달큼하고 미지근한 향을 꿀꺽 넘기며 생각했다. 나는 언제 어른이 된 걸까.


나는 분명한 어른이다. 누구든 나를 어른 취급한다. 편의점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맥주 한 캔을 집어 계산대에 올려놓으면, 자연스럽게 점원이 바코드를 찍는다.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가면 카운터에서 으레 "주차권 드릴까요?"하고 묻는다. 오늘은 귀찮아서 차를 안 가져왔다는 나른한 표정을 꾸며내며 "아뇨, 괜찮아요."라고 말하고는 뒤돌아서서 가만히 흥분한다. '오! 나 차있게 생겼나 봐!' (운전면허증도 없는 데다, 2년 전에는 에버랜드에서 범퍼카를 몰다가 기둥만 줄기차게 들이박는 바람에 몇 개월간 교통사고 전문 한의원에 다녔다.)


"준비... 땅!"  


출발 신호도 못 들었고 열심히 뛴 기억도 없는데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결승점에 도착한 것 같은 어벙벙한 기분으로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하나 확실한 건 달리는 내내 한 손엔 김밥을 꼭 말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건너오면서,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이 바로 요 김밥이다.




나, 어른이 되었네요
 



달큼한 촛물 냄새가 잠든 내 코를 살살 간질이면 눈이 번쩍 떠졌다. 이불을 걷어차고 주방으로 달려가면, 갓 지은 밥에서 나는 달고 따뜻한 냄새가 새벽 어스름과 한데 버무려져 내 입안으로 쏙 들어왔다. 엄마가 손으로 꾹꾹 말아쥔 김밥은 곧 터질 듯 아슬아슬 두꺼웠는데도, 한번 먹기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여덟 줄을 먹었다.(일반 김밥으로 치면 열 줄 가까이. '넘게'먹었지만 굳이 '가까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쑥스럽기 때문이다).


김밥이 여간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 아닌 줄 알면서도 툭하면 김밥을 해달라고 엄마를 졸랐다. 그 추운 수능날에도 도시락으로 기어이 엄마표 김밥을 싸갔고(김밥의 친구 떡볶이도 같이 싸갔다), 중국에서 유학할 때는 김밥을 못 먹어서 죽을 것 같다는 내 전화에 엄마가 항공우편으로 스무 줄을 말아 보낸 적도 있다. 가족들과 떨어져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는, 가끔 고향에 내려가 먹는 음식은 말할 것도 없이 김밥이다. 집에 가면 식탁 위에 산처럼 쌓여있는 김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예전처럼 김밥을 양손에 한 줄씩 움켜쥐고 가열하게 먹지 않는다. 싸 달라는 말도 어느 순간부터 여간해선 꺼내지 않는다. 혼자서 끼니를 해결하면서부터 김밥 싸는 수고를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끔 엄마가 예고도 없이 김밥을 보내오면 새벽부터 밥 짓고, 재료 손질하고, 당일택배로 보내려고 부리나케 동동거렸을 그 마음을 어림짐작이라도 하면서 "아침부터 고생스럽게..."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내가 하는 말을 내가 들으면서 생각한다. 나, 어른이 되었네.


술 못하는 유전자를 모조리 내게 물려준 엄마와 딱 한번 마주 앉아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수능 다음 날이었다. 아빠의 고약한 술버릇 때문에 술이라면 주종을 막론하고 치를 떨었던 엄마가, 나를 동네 술집으로 데려가 맥주 한잔을 사줬다. 둘 다 한두 모금 마시고는 얼굴이 금세 빨개졌는데, 급격하게 몸으로 흘러드는 알코올 때문인지, 갑자기 훌쩍 어른이 된 기분 때문인지 가슴이 쿵쿵거렸다. 내게 잔을 부딪치며 엄마가 무슨 말인가를 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느 아름답고 소중한 순간들이 그렇듯.


엄마는 무슨 말을 했을까. 몸을 쿵쿵 울리는 취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꺼냈을까. 고작 수능이 끝났을 뿐인데, 세상 다 끝난 것처럼 밤새 울고 얼굴이 퉁퉁 부은 딸아이에게 엄마는 무슨 말을 해주고 싶었을까. 엄마도 너처럼 펑펑 울고 싶을 때가 있다고, 그렇게 울 수 있어서 부럽다고, 엄마도 어른이 아직 힘들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까. 기억나지 않지만, 왠지 그런 말을 해줬으면 좋았을 거 같다. 어른도 어른이 힘들다는 걸, 그때는 정말 하나도 몰랐으니까. 


엄마가 싸주는 김밥을 실컷 먹고 어른이 된 나는, 이제야 엄마를 궁금해한다. 엄마를 어른으로 건네준 건 뭐였을까. 툭하면 김밥을 조르던  딸아이의 칭얼거림이었을까. 아이였던 나는 날마다, 날을 쪼갠 매 순간마다 살금살금 키를 높여 자라고 있었겠지만, 왠지 김밥을 꼭꼭 씹어 삼킬 때만큼은 불쑥 어른으로 크게 한 걸음 내디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김밥이 나를 아이에서 어른으로 무사히 건네준 것만 같아서 그 공을 모두 김밥, 실은 모두 잠든 새벽에 일어나 가만히 김밥을 싸던 묵묵한 등에게 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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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반지


     글로 마음을, 요리로 몸을 돌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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