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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나 안에서 존재연습18편|자기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부제_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명상 시작 전 선생님은 파드마 자세를 하되, 숙련자는 무릎 꿇은 자세에서 양다리를 허벅지 바깥쪽으로 빼내어 엉덩이를 대고 앉은 비라아사나(영웅자세)를 해보라고 하셨다. 나야 파드마도 아직 어설픈 모양새라 그대로 있었는데, ‘숙련자’라는 말에 움츠러드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내가 과연 숙련자일까? 선생님이 그냥 비라아사나를 해보라고 했다면 되든 안 되든 시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숙련자’라는 포인트가 달리는 순간, ‘숙련자’라 하면 능히 고난도 자세를 해내는 ‘클라쓰’처럼 느껴졌고, 거기에 내가 합류하는 게 맞을까, 주저하는 마음이 있었다.


 


내 옆에 앉은 수련생 한 분은 수련한 지 10개월이 넘었고 고난도 자세를 곧잘 해내는 분이었는데 정식 파드마 자세도 아닌 반가부좌 자세로 명상을 진행하는 게 아닌가. 아마도 그날따라 컨디션이 안 좋았거나 나처럼 ‘숙련자’라는 포인트에서 저어하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명상이 끝나고 선생님은 숙련자에게 비라아사나를 권한 이유에 대해 말씀하셨다. 파드마 자세로도 통증이 있는 사람은 그 통증을 바라보며 여기 머물러야 할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지만, 어떤 숙련자에게는 파드마가 더 이상 통증이 없는 편한 자세일 수 있다. 통증이 없는 익숙한 자세에서 언제까지 머물 것인가? 편한 곳에만 머무르려고 하면 무뎌진다. 그곳에서 더 나아가 어려운 동작을 찾고 새로운 통증 안에서 머무르며 자신의 부족한 부분과 마주하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그러니 선생님이 말한 ‘숙련자’는 ‘어떤 자세가 이제 익숙한 사람, 혹은 여기서 더 나아가 머무르는 경험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요가는 통증을 찾아 나서는 수련이라는 생각이 든다. In a peace로 득도한 수련 도사들도 마음의 동요나 사건을 찾아 산에서 한 번씩 내려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얼마 전까지 우리 요가원에는 유망주로 이름이 거론되기도 하는 남자 주짓수 선수가 매주 두세 번씩 요가 수련을 하러 왔다. 수련생들 사이에서 거의 청일점으로 몇 개월간 꽤 묵묵히 수련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배운 바가 있다. 그래도 주짓수 세계에서는 실력자일 텐데 아사나를 할 때마다 힘겨워하는 모습을 자주 봤다. 힘은 있으나 유연성이 부족하거나 안 쓰던 근육을 새로이 발견하느라 나름대로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몇 번에 그치지 않고 꾸준히 나오는 그의 묵묵함이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 한 단계 더 나아가려는 용기로 비쳤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과 마주한다는 것. 주짓수를 잘 해내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지점에 머무는 것. 투지나 과한 집념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꾸준하고 묵묵하게 채워간다는 느낌. 자신에 대한 그런 판단과 인정과 꾸준함은 용기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나를 믿는 용기, 내가 좋아하는 일을 존중하는 마음.

 

‘나는 이제 평온에 이르렀어.’

라는 말은, 어쩌면 머물던 지점에 머물렀을 때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산속에서 도를 닦던 도사들도 정기적으로 마음의 동요를 찾아 도시로 내려온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닐까.

 

선생님은 코로나19가 터지고 나서 어느 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제 웬만큼 어떤 말이나 행동에서 흔들리지 않을 만큼 평온해졌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큰 사건을 맞고 나니 여전히 움츠러들고 흔들리는 나 자신을 알아차리게 됐어요. 일상에서는 익숙해서 몰랐던 나 자신의 면을 이런 사건을 통해 또 한 번 발견합니다.”

 

머리 서기를 할 때면 선생님은 버티는 게 아니라 계속 평화의 지점을 찾아가며 머문다고 하셨다.

끊임없이 흔들리며 그 안에서 평화와 안정을 잃었다가 다시 찾기를 반복한다고.

어떤 날은 팔과 머리 자세를 잘못 잡고 머리 서기에 들어설 때가 있는데, 그러면 다시 자세를 잡는 게 아니라 그대로 그 안에서 비틀거리며 조금씩 자세를 교정하고 평화의 지점을 찾아간다고. 물론 머리 서기에 잘 머무르는 어떤 숙련자에게 선생님은 머리 서기 자세에서 더 나아가 다리를 뒤로 넘겨 우르드바 다누라아사나로 넘어가보라고 권하실 때도 있다.


 


역시 아사나를 할 때마다 수련은 달라지는 것이다.

수련을 적지 않게 한 선생님에게도 어떤 날의 머리서기는 편안한 자세가 아니며, 거기서 아직 더 머물러야 할 이유가 있고, 또 어떤 날은 편한 지점을 넘어서서 자신의 상태를 다른 지점에 던져보는 도전이 필요한 게 아닐까.

 

매일 운동을 해도 다음날 알이 배지 않거나 일상이 무료한 것은 편한 지점에서 오래 고여 있었다는 반증인지도 모른다.

 

‘난 여기서 매일 규칙적으로 일상을 꾸려가는 것으로 충분해. 충분히 배우면서 에너지를 쓰고 있어. 힘든 것도 안 힘든 것도 아냐. 여기서 나름대로 애쓰고 있어.’

 

이건 내 속마음이다. 제삼자가 보기엔 지루하게 반복된 일상을 사는 것 같지만 내 안에서는 선생님의 매일 달라지는 ‘머리 서기’ 같은 것. 이 안에서 흔들림 없이 머무는 것 같지만 내부로는 평화를 잃었다가 다시 찾기를 반복하며 치열한 것. 언젠가 이 지점이 편안하다 못해 신물 나는 날이 온다면 본능적으로 다른 자세를 찾아나서지 않을까. 여행을 떠난다든가, 하던 공부를 접고 다른 일을 해본다든가.

 

모두 일상 어느 부분에서는 숙련자다. 매일 방청소를 하는 패턴, 매일 출근하는 경로, 매일 점심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일의 숙련자. 그러나 본능적으로 우리는 어느 날, 매일 하던 일이 아닌 다른 쌈박한 걸 원하고, 전혀 관심 없던 취미를 찾아 구글링 하며, 아메리카노만 마시다가 어떤 날은 스타벅스 신메뉴에 거금을 지르기도 하는 것이다.

고통 속에서 유독 작용, 반작용의 힘이 팽팽하게 맞서긴 하지만 진화를 원하는 우리 마음은 이토록 본능적이다.

 

류시화 시인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인도는 인구 10억의 미로 속을 헤매는 것과 같다. 반짝이는 보석들이 감춰진 미로 속을. 그것들은 가슴을 가진 자에게만 발견된다. “성지 순례자의 물병은 성지를 모두 순례했지만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물병으로 남아 있다.”라는 힌두 노인의 말을 나는 새겨들었다.

세계와 나 사이에는 벽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행이 주는 선물은 그것이다. 나는 마르셀 푸르스트의 말에 동의한다.

“유일하게 진정한 여행, 젊음의 유일한 원천,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 다른 100인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다. 그들 각자가 보고, 그들 각자가 지닌 100개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당신이 체험하는 인도는 이 인도와는 다를지도 모른다. 여행의 지도는 저마다 다르다. 따라서 여행자 각각의 인도가 존재한다. 사람들 각각의 세상이 존재하듯이.(...)

인도를 여행하고 온 사람들은 처음 인도로 떠나는 사람들에게 많은 충고를 한다.

나 역시 ‘조심하라’고 자주 조언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관념과 편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진정한 여행은 이질적인 마주침과 신체적 변이를 경험하고 하나의 문턱을 넘는 체험을 하는 것’이라고 고미숙 인문학자가 말했듯이.

 

요가의 발원지답게, 요가는 인도를 여행하는 일과 닮았다. 류시화 시인의 말처럼, 요가 수련 역시 내 몸의 통증 속을 헤매는 일 같다. 통증에 가로막혀 숨겨진 내 안의 반짝이는 보석들을 찾아가는 여정. 그건 역시 발견할 가슴을 가진 자에게만 발견될 것이다. 하나의 자세 안에서도 우리는 100개의 시각을 가질 수 있고, 100개의 세계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시 100가지의 ‘이질적 마주침과 신체적 변이’를 경험할 때 가능한 일이 아닐까.

 

호된 인도 여행을 통해 삶이 180도로 달라지는 여행자처럼, ‘나’라는 사람의 깨달음과 변화는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거기서 내가 믿고 있던 것들이 엉망으로 깨지면서 미처 몰랐던 ‘내 모습’과 정신없이 대면한다는 사실을, 아직도 자주 믿지 못하고 믿고 싶지 않지만......

열릴 줄 모르던 묵은 서랍장 같던 마음의 문을 한 번씩 열어 본다. 그리고 정말 그러한가, 하고 두렵지만 대면해보려 더듬더듬한다.

지금 나 자신이 지겨워진다면, 혹은 아직 보지 못한 내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고 싶다면 나는 여기서 머물던 것을 멈추고 다른 지점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설혹 낯선 세계에 울음이 터질지라도.




(...)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순간 속에 자신을 유폐시키는 일도 이제 그만

종이꽃처럼 부서지는 환영에 자신을 묶는 일도 이제는 그만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 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 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 류시화 <여행자를 위한 서시>




이것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요가 선생님이 제게 빌어주셨듯,

이곳을 찾는 모든 인연의 숨이 자유롭고 시원한 바람 같기를,

제 안의 신성한 빛으로 당신 안의 신성한 빛을 향해  경이의 인사를 보냅니다.



 

     ABOUT AUTHOR

     여름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어슬렁거리며 방황하는 존재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흔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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