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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나 안에서 존재연습17편|우리는 사계절을 사랑하지

부제_환절기 감기에 걸릴지라도

 

2016년 1월. 제주도 올레 길을 걸으려고 혼자 비행기를 탔다. 그때의 심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실컷 걷고 싶었다고 할까. 폐가 터지도록 달리고 싶었다고 할까. 아무튼 오지게 몸을 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진우 교수님이 쓰신 두꺼운 니체 책 한 권과 여벌 옷가지, 수첩, 배터리, 노트북 정도. 최소한으로 싼다고 쌌는데도 무거운 책가방을 짊어지고 겨울 제주도 바닷가를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차긴 했지만 햇살이 어찌나 영롱하고 눈부시게 부서지던지, 제주 바닷바람은 머릿속 이물질을 쓸어버릴 것처럼 또 어찌나 차갑고, 하늘은 또 어찌나 눈이 아릴만큼 파랗던지 거기에 선 자체로 이미 몸속 절반은 정화된 기분이었다.

 

하루에 10km씩 일주일간 걷자는 게 목표였다. 걸으면서 둔한 머릿속의 길을 뚫는 것, 갖은 상처들로 아린 통증들을 해부하는 것, 나의 현 문제들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자는 생각이었다. 10km 구간마다 묵을 게스트하우스들을 대충 검색해놓고 걷기 시작했다. 파랗고 빨간 두 줄의 띠가 올레길 구간마다 이정표로 묶여 있으니 별로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 하루 이틀간 나는 멍한 머릿속에 침잠하느라 걸핏하면 이정표를 놓쳤다. 없는 주머니에서 돈 샐 일이 더 생긴다고 엄한 길로 흘러들었다가 괜한 에너지를 흘리기 일쑤였다. 어떤 날은 휑한 도로가로 빠져서 2, 3km를 미련하게 걷다가 뒤늦게 잘못 든 걸 깨닫고 낙망의 심장을 질질 끌며 한참 돌아 나왔다. 하루에 대여섯 시간 넘게 걸으면서 발바닥에 잡힌 물집은 잡혔다가 자진해서 터지고 헐기를 반복했다. 평일이라 올레 길을 걷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 어쩌다 한두 명 정도 우연히 지나칠 뿐이었다.

 

어렵사리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면 온몸이 후끈거리고 욱신거려서 가지고 간 니체 책은 가방 속에서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숙제를 끝내듯 간신히 일기를 쓰고 나면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렇다고 잠이 오는 것도 아니었다. 배가 많이 고프지도 않고 이런 생각만 들었다. 생각을 하려고 왔는데 어째서 걷는 동안 생각이란 게 전혀 되질 않는 걸까?

 

사흘째부터는 십분 마다 어깨가 빠질 것처럼 아팠다. 빠지려면 빠져버리라는 오기로 버티며 계속 걸으면 점점 어깨가 굳어서 뇌로 피가 통하지 못해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좀 자학적인 구석이 있긴 한 게, 발바닥의 통증은 이미 내려놓은 상태였다. 이 정도의 통증은 피가 나도, 발바닥이 걸레짝이 되더라도 그래 봤자 발이 잘리기야 하겠냐는 객기로 나 몰라라 했다. 그런데 허리와 어깨 통증은 그 수준을 넘어서서 숨을 틀어막는 지경이 되니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나흘째 되던 날, 사방이 트인 어느 바닷가의 긴 방파제를 걷다가 어쩔 도리 없이 십분 마다 돌 의자에 가방을 벗고 앉았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오고 내 어둠과 상관없는 햇살이 사정없이 환희의 빛을 퍼붓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그곳에서 오직 햇살과 하늘의 구름과 바람 소리만 들으며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흠씬 구른 몸속으로 햇살의 따사로움과 고요함이 깃들었다. 계속 걷느라 소요를 일으켰던 가슴속에 최초의 잔잔함이 밀려왔고 그제야 평화로운 감각과 함께 생각들이 돋아났다.

 

어느 날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를 지나치게 사랑하거나 연민하지 말고 그저 함께 동행해줄 것. 내 편이 되어 함께 걷되 과보호하지 말 것. 이런 날도 저런 날도 있는 ‘나’를 그대로 수용할 것.

 

그때, 방파제의 돌 의자에 앉아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 더럽게 평화롭네. 만신창인데 왠지 후련해......’

하늘이 뿌린 광활한 햇빛 그물망 아래 작게 몸을 구부린 내가 앉아 있었다. 햇살이 적외선 소독을 해주는 것처럼 마음이 따뜻하게 아렸다. 숨이 좀 쉬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요 속에 앉아서 ‘마음’을 바라봤던 것 같다. 연민이고 뭐고 감정이 끼어들 힘의 부스러기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 만신창이 상태로 순수하게 마음을 바라보고 감각하던 순간. 통증에 호되게 얻어터지고 나서야 깃드는 평화라는 것도 있다. 얄궂지만 그럴 때 오히려 더 감정에 빠지지 않고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도 있다.

 

어떤 날은 이정표도 제대로 못 보고 에너지를 질질 흘리고 다니는 미련하고 어리바리한 내가 있고, 또 어떤 날은 어금니를 깨물고 오기로 몸을 혹사하는 내가 있다. 눈부신 해안가가 있으면 쓸쓸한 해안가도 있었다.

 

다채로운 날씨가 하루하루 그러데이션을 이루며 오묘한 계절의 빛깔을 만들어가듯, 이런 날과 저런 날, 이런 나와 저런 내가 있다. 이런 나에서 저런 나로 건너가고 변형되며 쌓여간다. 얼음이 녹으면 봄비가 내리고, 봄비가 땅을 적시면 파란 싹이 돋아나고, 봄바람에 호수 위 물결은 춤추고, 축포처럼 터진 벚꽃은 하늘하늘 흩날린다. 이 모든 풍경이 모여 진한 향취를 뿜어내는 봄이 된다. 계절 안에도 여러 개의 얼굴이 있다. 내 속에 다른 내가 너무도 많아서 나는 자주 아프고 흔들리지만 또 한 번 다채로워진다.

 

‘잘하고 못하고’로 내 하루를 판단하지 말자. 우린 그렇게 단순하지 않잖아요. 그런 날과 이런 날을 삶의 실록(實錄)처럼 쌓아갈 뿐. 동요하지 말고 오늘의 이러함과 묵묵히 동행하기. 나를 이루는 하나의 큐브로 ‘오늘의 이러함’을 맞춰나가기.

 


 


다른 색 유화물감을 덧칠하듯 올레 길을 걷던 시간 위로 드롭 백을 시도하는 내가 쌓여간다. 오늘은 갈색이다. 선명한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드롭 백을 하진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 뒤로 허리를 구부린 날. 하루하루 다른 톤과 스펙트럼과 명도와 채도의 색깔을 쌓아간다. 이정표를 다시 찾으면서.

 



 

     ABOUT AUTHOR

     여름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어슬렁거리며 방황하는 존재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흔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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