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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나 안에서 존재연습16편|비장하지 말자

부제_누가 맛보기 음식을 비장하게 먹는가

 

‘클로저’라는 연극을 보려고 대학로에 간 적 있다. 연극을 자주 관람하는 편도 아니고, 권태로운 일상을 보내다가 오랜만에 새로움을 주입하고자 외출한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관람 좌석은 맨 뒷줄.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표정을 살피기에는 아쉬운 거리였다. 굴하지 않고 안경을 바짝 고쳐 쓰고 눈을 부릅뜬 채 2시간이 넘도록 뚫어져라 무대를 응시했다.

우습게도 연극을 관람하는 내내 눈앞이 멍해서 머릿속까지 덩달아 멍해졌고, 내가 지금 연극을 보는 건지, 저 멀리 무대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감지하고 있는 건지 인식 센서가 몽롱해져버렸다. 연극이 끝나고 결국, ‘클로저’는 나의 멍한 응시에 흡수되지 못하고 겉돌다가 흩어져버렸다.


가끔 잔뜩 기대에 찬 책을 읽으려 할 때, 작은 틈도 허용하고 싶지 않은 예전 버릇이 나온다. 활자 하나라도 놓칠세라 서문의 첫 문장부터 꼼꼼하게 읽으려고 힘을 꽉 준다. 그럴 때는 오히려 문장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읽었던 페이지로 돌아가서 읽고 또 읽는 일이 생긴다. 놓치지 않으려고 힘을 주다가 아무것도 붙들지 못한다. 너무 꽉 움켜쥐면서 흡수될 여지마저 막아버린다.


어려운 아사나를 하기 전에 선생님은 웃으며 말씀하신다.

“비장해지지 마세요. 가볍게 과감하게 쑥 가보는 겁니다. 경험하는 마음으로.”

 

수련생들은 잘 되지 않는 아사나를 거듭 실패하면서 자주 비장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심호흡을 하고 힘을 가다듬는다. 어떨 때 나는 혼자 중얼거리기까지 한다. 아, 안 될 것 같은데, 왜 안 되지, 다시, 다시 잘해보자, 하고. 그러면 자세를 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와중에 이미 힘이 들어가버린다. 그런 몸으로 유연해야 할 아사나를 해낼 수 있을 리 없다. 잘하고 싶은 마음도 저항이다.

내가 머물 수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가늠하려면 매번 새로운 지점을 발굴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숨의 끝이란 건 사실 없습니다. 숨을 ‘끝까지’ 들이쉬고 내쉰다고는 하지만 거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 너머로 가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섣불리 숨의 끝을 판단하는 건 자기를 제한하는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가 끝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가보지 않은 세계, 미경험의 아사나로 가보는 것은 나의 현재 능력을 가늠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거기서 머물 수 있을지 없을지, 거기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머물러야 할지 가보지 않고는 분명히 결정 내릴 수 없다. 그걸 판단하기 위해 우리는 가보지 않은 지점의 경계를 넘어봐야 한다. 처음부터 거기서 잘 머물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다. 비장해지지 않아도 된다는 건 그래서다. 속되게 말해서 맛만 보는 것. 거기서 경험의 확장은 시작된다.

 


이 사진을 보라. 오스트리아 빈에 갔을 때 마트에서 사 온 빵이다. 부드러운 생크림이 듬뿍 든 빵, 한 입 베어 물면 생크림이 입 안에 가득 찰 것 같지 않은가?

심지어 이 빵을 먹을 때도 나는 비장했다. 유럽에는 생각보다 한국의 크림빵 같은 느낌의 빵이 흔치 않아서 크림빵 덕후로서는 고생을 했기에 기대하는 바가 컸다. 이 빵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이토록 인심 후한 생크림 든 빵을 이다지도 저렴한 가격에 팔다니 유레카를 외쳤었다. 그러나 숙소에서 랩을 뜯어 저 빵을 한입 베어 무는 순간, 부드러워야 마땅할 저 하얀 크림인 척하는 요물은 설탕 부스러지듯 뻣뻣하게 깨지고 입안을 질 낮은 단 맛으로 절여버렸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큰 맘먹고 들어간 케이크 가게. 참고 참다가 도저히 생크림을 충전하지 않고는 안 되겠어서 거금을 내고 산 조각 케이크. 저 하얗게 발린 것이 부드러운 생크림 같은가? 아니, 생크림의 탈을 쓴 설탕 덩어리다. 포크로 찍으면 찍힌다니. 이 케이크 사건으로 나는 심장이 절반으로 접혀버렸다. 후유증이 예상보다 컸다.

이 모든 낙망이, 생크림이라면 응당 저런 모양과 색깔이리라 믿었던 나의 고정관념 때문이었을까? 그럴지도. 그러나 기필코 맛있어야 한다는 기대, 비장한 기대감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이곳 디저트는 어떨지 맛볼까? 정도의 가뿐한 마음이었다면 경험한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너무 비장하면 실패하는 자신에게 엄격해진다. 방콕에서 오토바이 맨에게 거금을 삥 뜯기고 나서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을 힐난했다. 오토바이를 이용하기 전에 평균 요금이 얼마인지 미리 검색해봤어야지, 뜯긴 네가 멍청하다. 그 돈이면 택시 몇 번을 더 타고 길거리 음식도 먹을 수 있는데... 가난한 배낭여행자란 돈에 궁색해지기도 하지만, 좀 더 경험하는 일에 너그러웠다면 실패해도 기분을 무너뜨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 일로 나는 내가 무엇보다 실패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임을 분명히 자각했다.

 

‘성공과 실패’를 단호하게 구분 짓고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니 새로움을 시도하는 일에 자주 주저했다. 새로움을 강렬히 원하면서도 실패가 두려워 안정적인 길로 가려고 했다. 적성검사를 할 때 매번 헷갈리는 부분은 그것이었다. 새로움을 갈망하면서도 안정성을 원한다? 그건 어느 쪽인가. 이제야 말하면, 나는 안정적인 삶을 원한 게 아니라 새로움 속에서도 실패하지 않는 삶을 원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루하고 오만했던 것이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신(新) 체계에 발을 들이고 싶었던 건가? 오차가 없다면 안정적이긴 해도 또 얼마나 지루한가.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새로움이란 존재 불가능한 게 아닐까. 익숙하지 않고 예상과 달라서 새로운 자극을 느끼는 것인데.

 

‘실패’는 ‘새로운 경험’이 낳은 말이고, ‘실패’의 본명은 ‘감각하는 시간’이다.

 


 

<노동의 십자가 - 현악사중주> 최종천

 

베토벤이 현악사중주에서

불협화음을 마음껏 끌어들여 즐긴 것은

일종의 놀이이다.

노동을 놀이로 만드는 일은 간단한다.

실수를 하면 되는 것이다.

치수도 각도 다 틀리게

시간과 공간과 희롱하면서

잘못 자른 것은 다시 붙일 수 있고

붙인 것은 다시 자를 수가 있으니

실수는 성공보다 즐기기에 좋은 것이다.

실패란 옮게 된 것이라 할지라도

의도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예술의 완성은 의도와는 상관이 없다.

이것이 우리가 예술에 몰두하는 이유이다.

노동은 그것이 실수라는 것을 알게 되면

즐길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견승공한테 시켜놓고 보면 좋다.

뭐든 실수와 실패를 통하여 배운다.

안다는 것은 이렇게 재미없고 위험하다.

사실, 예술이란 형상을 다루는 것으로

시종일관하는 시행착오이다.

예술은 허구이기 때문에 실수와 실패를 즐길 수 있으나

노동은 질료인 실체를 다루기 때문에

실수와 실패가 용납되지 못한다.

인간이 노동에 몰두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 『인생은 짧고 기계는 영원하다』




쓸데없이 비장해지지 말자. 예술하듯 시행착오 속에 몸을 밀어 넣고 감각하자.

 


 

     ABOUT AUTHOR

     여름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어슬렁거리며 방황하는 존재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흔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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