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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나 안에서 존재연습14편|숨 끝에서 한 번 더

부제_어느 날 ‘쿰바카’

 

어느 날 ‘쿰바카’라는 수련에 몰입하는 시간을 가졌다.

 

척추를 바르게 세우고 앉아서 호흡한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더 이상 들어갈 숨이 없는 지점에서 한 번 더 연속하는 느낌으로 숨을 마신 채 머금는다. 숨을 내쉴 때도 더 이상 내쉴 숨이 없을 만큼 복부를 납작하게 조이며 내쉰 뒤, 그 너머에 공간이 더 남아있다고 상상하며 한 숨을 더 뱉듯 유지한다. 그럴 때 팽창의 숨은 서른세 마디의 척추를 한껏 벌리며 뼈 마디마디를 확장한다. 한계까지 숨을 들이마시거나 내쉬고도 한 숨을 더 얹거나 짜내듯 호흡을 유지하는 것은, 언뜻 숨이 멈춘 듯한 찰나의 숨의 보유 속에서 일어나는 확장과 수축을 위해서다. 멈춤이라기보다는 뛰어넘는 공간 속에서의 머무름이다. 풍선을 크게 불어 바람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매듭지어야 그 확장된 크기에 머무를 수 있고 더 커질 여지를 마련할 수 있듯.

 

이 수련을 통해 나는 숨을 내쉬며 수축하는 것보다 숨을 마시면서 팽창할 때 더 얕고 짧게, 빠르게 한계점을 느꼈다. 그러니까 내쉴 때 더 천천히 오래, 깊이 내쉴 수 있었다. 내 식대로 해석해보자면, 서른세 마디의 척추 뼈가 빡빡하게 붙어 있거나 유착(?)되어 있는 것에 더 익숙하고 간격을 넓히는 일에 더 버거워한다는 것. 달리 말하면, 수축이 팽창보다 더 편하다는 것이며 수축하는 힘과 팽창하는 힘이 불균형하다는 뜻이다.

 

더 확대해보면 숨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내 속에는 뼈 마디마디로 이루어진 숨의 길(道)들이 있는데, 그 길들이 무척 협소하다고 상상한다. 그래서 숨과 피와 물과 물질들이 어떤 길에서는 정체되고 고인다. 막다른 길이란 있어선 안 되는 곳에 막다른 길이 생겨버린다.

 

숨길의 간격을 넓히는 일은 본능적으로 수축하며 자기 방어를 일삼는 존재에게 특히 중요하다. 수축은 틈을 없애면서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비교적 단단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처세술이 된다. 긴장을 잘하는 사람은 습관적으로 수축하고, 그래서 대부분 몸에 힘이 들어가 있다. 힘을 준 몸은 돌처럼 딱딱해지고 숨길도 메운다. 수축 외길은 방어에 유리하지만 숨을 희생하고 얻어내는 일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결국엔 숨을 반납해야 하고,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좁혀진 숨길에서 희박한 숨을 몰아쉬느라 급급해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는 거대하고 위압적인 체구를 한 ‘빅브라더’가 등장한다. ‘빅브라더’는 어둑한 침실에 앉아서 온몸으로 정교한 숨을 들이고 내보내며 근육을 단련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어떻게 숨을 쉬는 것으로 그런 몸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때는 비현실적인 세계 속의 비현실적인 인물이라고만 여겼다.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하루키의 ‘빅브라더’가 ‘쿰바카’를 수련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쿰바카’라면 숨을 쉬는 것만으로 그런 몸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분명히 하루키는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숨이 지닌 역할과 위력에 대해.

 

처음 ‘쿰바카’를 멋모르고 따라할 때는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숨을 따라가느라 급급해서 혼란스러웠다. 숨을 쉴 때마다 자세는 흐트러지고 근육은 경직되었다. 무엇을 위해 이런 숨을 쉬며 눈을 감고 있는 걸까. 숨의 포화 상태에서 한 호흡을 더 머금는 행위는 어떤 종교적 행위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제 ‘쿰바카’를 수련할 때면 나는 어쩐지 슬퍼지고, 슬프지만 삶의 의지나 희망을 향해 다시 뻗고 싶어지는 손을 상상한다. 여전히 무력하지만 이대로는 머무르고 싶지 않은, 더 나은 평온을 소망하는 아련함으로 한 번 더 팽창하듯 손을 뻗으려는 걸 감각한다. 그 감정은 말한 대로 어쩐지 먼저 슬퍼지지만 슬프기만 한 슬픔이 아니라 아직 소망을 완전히 잃지 않은 슬픔이다.

 

길상호의 시 <희망에 부딪혀 죽다>의 날벌레들처럼 희망은 때로 속이 까맣게 그을리는 줄도 모르고 형광등에 투신하게 하는 ‘큰 수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희망은 괴로움 속에서도 다시 한 번 잘살고 싶은 마음을 발견하는 자의 ‘뻗은 손’이 되기도 한다.

 

“요기들은 들숨과 날숨의 사이, ‘숨 멈춤’의 공간에 삶의 비밀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글자 그대로 보면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숨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삶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숨 멈춤이란 곧 죽음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역설적 표현이다. 삶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숨이 멈춘 그곳에 답이 있다. 요기들은 그 빈틈에, ‘무(無)가 있는’그곳에 창조력과 활기가 가득한 생명의 원천이 있다고 말한다.

생명의 원천에 닿으려면 들숨과 날숨 사이에 있는 ‘잠시 멈춤’의 순간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 숨과 숨 사이의 빈틈에, 특별하고 기적적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는 열쇠가 있다.” - 배런 뱁티스트 『나는 왜 요가를 하는가』 중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사람은 감동받을 때 행복하다고 느끼며, 기적은 감동이 깃들 때 일어난다고. 내 몸을 쓰며 일어나는 모든 변화가 기적이며 감동임을 알아차리자고.

 

‘뻗은 손’은 곧 ‘숨 끝에서 한 번 더 붙드는 숨의 갱신’이자 기적이 아닌가.

 

나는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한 번 더 팽창하고 싶다. 더 숨을 잘 쉬고 싶다. 내 숨길이 시원한 바람이 넘나드는 너른 길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오늘도 ‘쿰바카’를 수련하며 한 호흡을 더 머금고 다르게 변화하고 싶어 하는 몸의 의지를 감각한다. 찰나지만 새롭게 피어나려는 생명의 변화와 순환을 알아차리며 감동한다. 감동하며 슬퍼하고 슬프지만 또 숨을 쉰다.

 


 

     ABOUT AUTHOR

     여름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어슬렁거리며 방황하는 존재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흔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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