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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좋아하는 작품들과 이야기들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매주 마인드풀에 관한 다채로운 정보와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작가가 되고 싶은 분들은 오른쪽 상단의 '호스트 시작하기'를 참조해주세요. 


설익은 마음에게 한 입04. 숨이 턱 끝까지 차지 않아도 -핫초코



오직 핫초코입니다 

피곤이 고인다. 목요일. 직장인을 기준으로 (휴일이 끝났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월요일의 비통함과 (비로소 현실을 수긍하는) 화요일의 침착함과 (업무효율과 스트레스가 동시에 최고조로 올라가는) 수요일의 클라이맥스까지 휩쓸고 간 일주일의 네 번째 날. 환희의 금요일 D-1. 몽롱한 눈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피로한 건 상태일까, 기분일까 잠깐 고민에 잠긴다. 명상을 배울 때 "피로하다는 생각 때문에 피로한 겁니다! 그 생각을 버리세요!"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선생님의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 이건 생각일 뿐이야.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어 머릿속 생각을 털어버렸다. 자, 된 건가? 난 이미 생각을 버렸는데 피로가 나를 버리지 않는다. 네이놈 어딜 내빼느냐며 내 멱살을 잡고 흔든다. 피로 앞에 납작 엎드려 사죄할 밖에. 


아이고, 어떻게 연락도 없이 오셨어요. 제가 오늘 회의도 있고 보고서까지 써야 하는데 아침부터 이렇게 찾아오시면... 아유, 싫다는 게 아니라요.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제가 얼른 핫초코 한 사발 갖다 바치겠습니다. 예? 망원동에 그... 핫초코 아니면 안 드신다고요? 아, 거기 알죠... 여기서 좀 많이 먼데... 아뇨 오, 귀찮을리가요. 안 그래도 망원동 가려고 했어요. 하하하...


회사에선 쉽게 피곤해진다. 조금만 모니터를 보고 있어도 눈이 빡빡하고, 몇 번을 내리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서류 앞에서는 한숨이 푹 나온다. 그럴 때면 내 몸은 핫초코를 소환한다. 찐한 핫초코 한잔이면 언제 그랬냐 싶게 맑은 날씨처럼 갠다. 상태가 개는 건지, 기분이 개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늘은 퇴근하고 핫초코 마셔야지"라는 생각만으로도 온천에 어깨까지 푹 담근 것처럼 마음이 노곤 노곤해진다. 그렇다면 나는 왜 핫초코 일까? 이건 파블로프의 개 같은 이론으로, 내 몸이 기억하는 공식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피곤할 때는, 어김없이 핫초코 한 잔을 마실 수 있었던 나의 유년으로 가보자.



부셔버리겠어, 악당! 

내가 몰래 '악당'이라고 이름을 붙인 외할아버지(이하 할아버지)는 엄격한 자기 관리의 표본이다. 항상 새벽이면 400미터 운동장을 스무 바퀴 도는 걸로 하루를 시작했다. 지구력을 기르기 위한 달리기가 끝난 다음에는 커다란 벽 앞에서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며 근력과 순발력을 키웠다. 그런 뒤에 출근을 하셨다. 주말에도 집에 안 계시면 할아버지를 찾으러 운동장으로 향하는 게 당연했고, 어김없이 찾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20대의 어느 날 문득 시작한 달리기+ 테니스 콤보를 그 뒤 50년간 단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와 이건 좀 지독하다 싶어 그런 별명을 붙인 것인데 문제는 내가 그의 손녀였다는 거다. 


(달리기와 테니스는 당연한 거고) 일단 자전거. 페달이 발에 안 닿는데도 어른 타는 쌀집 자전거를 탔다. "할아버지! 손 놓지 마세요오오오!"라는 외마디 절규와 함께. 내 또래의 아이들은 팔랑팔랑 치마 입고 우아한 턴을 돌 때, 나는 웬일인지 선수용 스케이트를 신고선 할아버지의 신호에 맞춰 허리를 바짝 숙이고는 얼음 위를 가르고 있었다. 그뿐인가. 손녀가 테니스에 영 흥미를 붙이지 못하자, 할아버지는 테니스 라켓 대신 배드민턴 라켓을 쥐어주셨다. 강도는 테니스 못지않아서, 배드민턴을 칠 때는 쉬지 못하고 내리 두 시간을 쳤다. 그렇게 치다 보면 맞은편의 상대가 할아버지건 누구 건 간에 그저 지구를 파괴하러 온 악당으로 보인다. 땀이 뚝뚝 떨어지는 이마를 손으로 훔치며 조용히 중얼거리는 거다. "부셔버리겠어..."


운동장을 뛰고, 얼음을 가르고, 쌀집 자전거와 함께 넘어지고, 라켓을 휘두르고... 힘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었다. "할아버지 미워!"하고 집으로 가버리면 그만 일 텐데, 나는 마치 태릉 선수촌을 목표로 하는 꿈나무처럼 이를 악물었다. 역기까지 들라고 했으면 들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퀘스트에 대한 보상이 핫초코였기 때문이다. 훈련(?)이 끝나고 나면, 할아버지와 나는 자판기 앞에서 핫초코를 한잔씩 나눠마셨다. 숨을 몰아쉬면서, 쿵쿵 쿵쿵 클럽 비트보다 더 빨리 뛰어서 아픈 심장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면서, 아주 천천히 들이키는 핫초코 한잔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은 언제나 파랬고, 내 몸에는 달콤하고 뜨끈한 기운이 가득 퍼져 어지러웠다.


너무 힘들어 번번이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정신 차려보면 스케이트장, 테니스장, 배드민턴 코트였다. 그때마다 나는 핫초코 한잔을 마시기 위해 한 마리의 개가 되어 중얼중얼 마법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는 거다. "악당, 오늘도 어김없이 승부다! 부셔버리겠어..."



마지막 승부를 기다릴게요 

이젠 맘만 먹으면 핫초코 백 잔도 사 마실 수 있다(... 있겠지?) 자판기의 위생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자판기 앞에 서서 뭔가를 뽑아 마시는 일은 쌍팔년도 풍경처럼 아련하고 아득하다. 이 많은 카페가 대체 어떻게 먹고사나 걱정이 될 정도로 거리마다 예쁜 카페가 넘쳐난다. 그리고 그 예쁜 카페에선 예쁜 잔에 담긴 핫초코를 내어준다. 손가락 끝으로 핫초코가 알맞게 담긴 잔의 온기를 만지작 거릴 때마다, 이런 일(?)에 핫초코를 마셔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마에서 시작해 얼굴로 흘러내리는 땀방울도, 정신없이 뛰는 심장박동도 없는데 근사한 핫초코 한잔을 마주하고 있다니. 파블로프의 개가 어느 날 종소리 없이 밥을 먹게 된다면, 아마 나와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중요한 뭔가가 빠진 느낌. 어쩌면 피로는 명상 선생님이 말한 생각도 아니고, 기분도 아니고, 상태도 아니고 정말 중요한 무엇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이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무척 소중한 그 무엇. 


나와 함께 지구를 놓고 자웅을 겨뤘던 악당-성실한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은 순한 아기처럼 하루 종일 소파에 앉아있다. 달리기도 테니스도, 늘 곁을 따라다니던 부인의 잔소리도 없이 가만한 하루를 보낸다. 명절이면 가끔 얼굴을 비추는 손녀에게 "대체 언제 인간답게 살 거냐"는 말로 결혼을 채근하며 승부를 걸어오긴 하지만(부셔버리겠... 아, 이건 아니지), 그런 승부는 손가락 하나로도 퉁겨낼 수 있어서 시시하다.

"제가아~ 성격이 더러워서 좋다는 남자가 엄쏘요오. 오. 똑. 하. 죠. 할. 아. 부. 지?"

나의 혀 짧은 소리에 외할아버지는 입을 헤 벌리고 나를 바라볼 뿐. 


나도 일찌감치 지구 영웅을 은퇴했다. 악당이 있어야 영웅이 있는 법이니까. 먼지 날리는 흙 운동장과 빙판과 아스팔트 위에서 때를 마다하지 않고 벌였던 승부는 두 번 다시없겠지만, 우리가 한때 지구를 놓고 뜨겁게 겨뤘던 사이라는 걸 기억해주길. 자판기 핫초코 한 잔에 무모하게 나의 모든 걸 거는 바보 같은 일도 다시 하지 않겠지만 아니, 다시 할 수 없겠지만 혹시 또 모르지. 악당이 지구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승부를 걸어온다면 언제든 응할 준비가 돼있다. 땀 닦는 척하며 눈물을 좀 닦을 것 같긴 하지만.



아, 오늘은 특별히 찐한 핫초코로 마셔야겠다.



    

  ABOUT AUTHOR

     꽃반지


     글로 마음을, 요리로 몸을 돌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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