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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나 안에서 존재연습13편|형태보다 감각

부제_눈을 감습니다

 

요가원에는 거울이 없다. 대신 아이보리색 커튼을 통과하는 엷은 빛과 심신을 누그러뜨리는 향, 정신을 한 데로 모으는 음악과 온기가 있다. 그 아늑한 공간의 문을 열면, 공간은 즉각적으로 여러 방면의 감각으로 달려와 몸을 감싸며 인사한다.

 

“어서 와.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감사해.”

 

‘아늑하다’는 말을 들으면 ‘늑골’을 연상하곤 한다. 물론 ‘아늑하다’의 ‘늑’과 ‘늑골’의 ‘늑’은 동음이의어다. 한글과 한자라는 엄연한 차이에도 ‘갈빗대’를 지칭하는 ‘늑(肋)’의 효과 때문인지 ‘아늑하다’고 하면 갈빗대를 포근하게 감싸 안는 공기, 그 공기로 안온한 공간이 떠오른다. 이는 곧 ‘아늑함’을 감각하는 일일 것이다.

 

때때로 공간의 구조나 크기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 반지하에서 지붕에 깔릴 듯 불을 밝히고 있는 옷 수선집이나 사람 키보다 높은 책 더미로 좁고 어두침침한 공간에서 작은 스탠드 불빛에만 의지해 책을 읽는 헌책방에서도 아늑함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형태보다 감각에서 더 위안을 얻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아늑한 수련 공간에서 많게는 열 명 이상, 적게는 여섯, 일곱 명의 수련생들이 모여 선생님의 리드 아래 수련한다. 대부분 열 명 가까운 인원이 모여서 요가매트와 요가매트를 바투 펼쳐놓고 수련한다(코로나19가 터지기 전의 일입니다). 그럴 때 선생님에게는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 옆 사람과 부딪히는 일 한 번 없이 내게 허용된 요가매트 내의 세계에서 얼마든지 아사나를 천천히, 깊게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한다. 한 가지, 불가피한 일은 마주 보며 나란한 요가매트 위의 수련생들과 양 옆으로 나란한 수련생들의 동작을 거울 보듯 보는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산스크리트어로 된 아사나 용어를 말할 때, 선뜻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옆 사람의 자세를 힐끔거릴 때도 그렇다. 그럴 때는 아무래도 영향을 받는다. 마치 거울을 보듯 내 자세를 점검하거나 비교하는 마음이 생긴다.

 

선생님은 자주 조언한다.

“눈을 감으세요. 옆 사람을 보지 말고 내 감각에 집중합니다.”

 

나는 균형을 잡아야 하는 자세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따라가지 않기 위해 대부분 눈을 감고 수련한다. 감각을 더듬고 알맞은 지점을 찾아가는 것, 내 감각 안에서 더 깊어질 여지를 찾아가는 것이 그 시간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이다.

 

“형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형태보다는 감각에 집착합니다. 과한 집착은 해롭지만 때론 건강한 집착이 필요합니다.”

 

다리를 일자로 길게 뻗는(찢는) 자세에서 눈을 감고 가슴 앞에서 합장할 때, 내게 찾아온 고통을 바라본다. 엉덩이 바로 위쪽 허리 부근와 허벅지로 이어지는 골반이 뭉쳐서 뻣뻣하다. 통증은 의외로 가랑이가 아닌 그곳에 도사리고 있음을 그제야 알아차린다.


 


그렇다면 마음의 감각은 어떨까.

 

나를 지배하는 마음의 감각은 일상에서 예고 없이 출현한다. 카페에 오는 손님의 어떤 태도에서, 지인을 통해 만난 어떤 자리에서 무어라 꼬집을 수 없는 불편한 감각을 경험한다. 형태는 때로 감각을 속이고 혼란스럽게 한다. 그리고 그 형태 속에는 명백히 내 감각을 부대끼게 하는 공기가 은밀히 도사리고 있다.

종종 불편하게 다가온 감각은 화생방 가스처럼 조용히 피부에 들러붙어 있다가, 아무래도 께름칙해서 손을 들어 건드리면 따가운 통증을 유발한다. 감각은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인 면이 있어서 다가오는 감각은 본능적으로 수렴해버리지만, 그 정체를 알아내려면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외부의 액션은 감각을 만들어내고 나는 자주 무방비 상태로 그 감각의 노예가 된다. 그래서 아직 자기 감각을 이해하고 적당 선을 찾아가는 데 에너지가 소모되는 사람에게는, 불시에 들이닥치는 감각에 일일이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무엇이 나를 위한 생각인지, 어느 길로 가야 최선일지에 대한 용례를 쌓는 일이 쉽지 않다.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나를 되짚어보고 용례를 쌓아서 데이터가 두둑하다면 어떤 감각에는 확신이 생기지 않을까?

 

감각에 둔해지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을 따라가지 않고 나를 믿는 마음이 필요하다.

“넌 뭘 그런 걸 가지고 소심하게 그러니?”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모른다. 내 감각과 당신의 감각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다리를 일자로 뻗는 하누만아사나를 할 때 누군가는 가랑이가 아플 수도, 또 누군가는 골반이 아플 수도 있다. 난 골반이 아픈데 넌 어째서 오금이 아프니? 넌 참 희한한 애구나, 라고 말할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시길.

나는 그들과 다른 몸과 마음의 역사를 지나왔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다르게 아프고 다른 부분에서 강인하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는 있다. 내가 원하는 ‘감각의 이상적 형태’가 있구나. 이 이상(理想)에서 벗어난 감각의 형태가 불시에 밀려올 때 불편을 느끼며 틀렸다고 생각하는구나. 친밀하지 않은 관계에서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일삼거나 단정하는 투로 말하는 사람을 만날 때, 다른 시대 속에서 구축된 사고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가치관을 옳다고 밀어붙일 때 나는 그 형태 속에서 불편한 감각을 느끼고, 형태에 압도되어 그 사람 자체를 부정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가령, 누구나 부드러운 말투를 쓰진 않지만, 부드럽게 말하지 않는다 해서 그 사람의 의도나 생각까지 틀렸다고 단정할 순 없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데에는 나와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다만 그 거친 형태에서 마음이 먼저 상해버리고 그들의 사정은 궁금해지지 않을 뿐(물론 그 형태가 거칠고 안 거칠고를 판단하는 기준도 주관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형태도 감각 못지않게 중요한 걸까.

 

그러나 또 이내 이런 생각이 든다. 형태가 흐트러진 아사나를 하는 사람은 자기 감각 안에서 그 자세가 최선일 수 있다. 나 역시 지금 감각하는 것을 최선이라고 받아들이듯, 누군가는 본인의 어떤 부분이 굳어 있는지도 모르게 그 형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혹은 그 감각과 형태를 옳거나 이상적이라고 믿거나.

역시 형태를 좌우하는 것은 감각인 걸까. 자기 통증을 거울삼아 딱 그만큼만 타인의 통증에 공감할 수 있는 걸까.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저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이런 말을 했다.

“‘폭력’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정의를 시도해본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한 것이며 타인의 진실이란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를 편리하게 망각한 채로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


나를 정확히 인식하고 위로할 수 있다면, 타인의 고통에도 더 섬세해질 수 있을까. 타인의 ‘말’은 어쩌면 타인의 ‘통증’일까? 만약 그렇다면, '통증'이 만들어낸 타인의 '말'에 휘둘리고 상처 받는 것은 '말' 저변에 있는 타인의 통증에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일까. 내게 상처 주는 사람은 내 통증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내가 상처 주는 사람의 통증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모두 자신의 통증에만 사로잡히는 걸까. 그렇다면 자기 통증을 감각하려는 행위는 혹 '내 통증'에만 몰입하는 부작용을 유발하는 건 아닐까. 역시 회피하는 통증은 돌도 도는 걸까. 결국 내 통증에만 함몰되지 않으려면 통증에 직면하고 싸울 수밖에 없는 걸까.

 

통증을 감각하는 이유는 거기에 통증이 있음을 알고 파괴하기 위함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통증의 파괴는 정확한 인식(감각)과 이해가 바탕되어야 한다. 감각해야 파괴할 수 있고 파괴해야 편안한 형태로 설 수 있다. 타인의 말이 통증이 되는 것은 어쩌면 내 안에 여전한 통증이 있기 때문에, 타인 또한 자신의 통증을 파괴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 아닐까. 각자 자기 통증에만 몰입하기 때문이 아닐까.

 

눈을 감지 않아도 감각할 수 있다면, 평온한 내부의 바람을 감각할 수 있다면, 타인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타인의 감각에 공감하고 내 감각 안에서도 바로 설 수 있다면......

 

하지만 눈을 감고 내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도 여전히 실패를 거듭한다. 그러나 또 알아차린다. 지난번 통증의 크기와 이번 통증의 크기를.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통증을 발견하고 거기 있는 통증의 역사를 감은 눈 속에서 더듬는다. 내 통증에 더욱 예민해질수록 세포처럼 작고 빼곡한 통증을 빠짐없이 감각할 수 있다면, 통증의 경험치는 커지고 파괴한 통증의 경우의 수만큼 타인의 통증에 공감할 수 있는 범위도 넓어진다면....... 통증을 만들어낸 나의 무감각함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



 

     ABOUT AUTHOR

     여름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어슬렁거리며 방황하는 존재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흔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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