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A

우리가 좋아하는 작품들과 이야기들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매주 마인드풀에 관한 다채로운 정보와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작가가 되고 싶은 분들은 오른쪽 상단의 '호스트 시작하기'를 참조해주세요. 


프라나 안에서 존재연습12편|오직 자기만의 미묘한 선

부제_누구도 아닌 나만 알 수 있는 것

 

근육과 근육 사이에도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상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스트레칭을 하더라도 근육을 엿가락처럼 늘리는 그림만 떠올렸지, 엿가락(근육질)과 엿가락(근육질) 사이에 기포 같은 동그란 공간을 만드는 그림은 그려보질 못했다. 그것은 하나의 작디작은 ‘방(room)'을 만드는 일 같다. 방은 아주 천천히 세밀하게 만들어지기에 작을 수밖에 없다. 동그랗고 작은 방이 단번에 커져버리면 생성되려는 찰나 방을 연결하는 엿가락과 엿가락이 팽팽한 탄성을 버티지 못하고 끊어지고(혹은 찢어지고) 동시에 방은 파괴된다. 생성되기 직전에 파괴된다.

 

사람마다 근육질과 근육량, 골격과 골밀도 등이 다르기 때문에 ‘방’이 만들어지는 속도도 당연히 다르다. ‘방’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는 뭉친 반죽을 홍두깨로 밀 듯 근육을 늘리고, 어긋난 축대 같은 뼈를 당겨오거나 밀어내는 교정의 시간이 필요하므로, 통증을 느끼는 정도, 통증을 흡수하거나 밀어내는 정도, 통증에 머무를 수 있는 정도 또한 달라진다. 따라서 ‘방’은 사람의 수만큼 다르게 발달하거나 소멸하며, 확장되거나 정체된다.


 

만일 위와 같은 자세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팔을 뻗어 손과 손이 맞닿게 하려는 ‘감각’ 안에 머문다면, 손이 닿지 않더라도 자기 감각 안에서 서로 닿으려는 그림을 그리며 단 0.1mm라도 숨을 쉬며 좁혀 가거나 좁혀 가고자 하는 ‘마음’ 안에서 머문다면, 밖에서는 미동 없는 자세로 보일지라도 안에서는 ‘방’을 만들고 있는 과정이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머무는 상태, 거기에는 분명히 통증이 발생할 것이다. 통증이 발생하기 때문에 멈추는 듯 머무는 것이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의 통증이기 때문에 후퇴하지 않는 듯 머무는 것이다. 때로 어떤 통증은 나에게 가학적일 정도만 아니라면, 나의 확장을 위해 동반되는 통증이다. 그것은 도전의 통증이고, 개척의 통증이며, 열림의 통증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느 정도가 나에게 폭력적이지 않으면서 내 안의 확장을 도모하는 도전의 통증인가 하는 ‘미묘한 선’, 오직 자기만의 ‘미묘한 선’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우리는 적절한 선을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아사나를 하다가 이전 상태로 돌아가서 쉬더라도 나태해지지 않고, 고난도의 아사나에 도전하더라도 어느 선까지 따라가는 것이 현재 내가 머물 수 있는 정도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다른 곳으로 눈과 귀가 쏠리지 않고 오직 내 안에, 내 감각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눈을 감고 내 감각에 집중합니다.”

 

확장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방’을 만드는 일은 통증 속에서 머무를 때 가능한 일이다. ‘확장’은 공간을 확장하는 일뿐 아니라 힘을 넓게 분산하다는 의미도 포함한다고 한다. 내 옆에서 고난도의 아사나를 척척 해내는 사람이 있더라도, 설혹 그가 몸을 유연하게 접는다고 보이더라도 당사자에게는 통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방’ 안에서 오직 자신만의 통증 안에 머무는 일이다. 그에게도 그가 지나온 통증만큼 현재 그만이 감당하는 통증이 분명히 있다. 다만 그 통증이 이제 여러 개의 방 안에서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의, 혹은 더 나은 확장을 위해 기꺼이 감당하고 싶은 선의 통증인 것이다. 누군가는 통증 속에서 도전을 희망한다. 모든 통증은 가학적인 통증이 아닌 도전과 개척, 열림의 통증일 때 의미가 있다.

그 미묘한 선을 알아차릴 때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서 휴식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나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며, 배려와 존중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만이 그만한 용기를 낼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인간의 정체성은 ‘경험한 삶’을 통해서만 성립된다고 믿었다. 부유한 백인 남자가 아무리 노력해봐야 가난한 흑인을 이해할 수 없듯,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여성으로서의 불이익과 차별을 직접 경험해야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여성 정체성은 유대계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구별한 단순히 외향적이고 무의미한 ‘체험’이 아닌 내면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들은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되었는가』 중

 

‘나’도 마찬가지 아닐까.

누구도 ‘나’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타인이 아무리 나와 비슷한 점을 숱하게 발견해도 ‘나’는 누구와도 같지 않은 미묘한 차이를 안고 있다. 그 미묘함은 작지만 결정적이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나만의 핵이다. 그러므로 ‘나의 내면적 변화’는 오직 나만 경험할 수 있고, 현재 내가 머무를 수 있는 통증, 나를 확장하거나 보호하기 위한 그 ‘미묘한 선’은 오직 나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고 나에게 집중한다. 흔들릴 것 같으면 눈을 감고 내 감각을 더듬어야 한다. 나태하지 않은, 나의 보존과 확장을 위해서 눈을 감는 것이라면 얼마든 감아도 좋다. 감은 눈 속에서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면.





 

     ABOUT AUTHOR

     여름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어슬렁거리며 방황하는 존재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흔들릴 예정입니다.


       작가 호스트 소개 바로가기


 

점심시간 12:30 - 14:00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뉴스레터 발송을 위한 최소한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용합니다.
수집된 정보는 발송 외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며, 서비스가 종료되거나 구독을 해지할 경우 즉시 파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