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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나 안에서 존재연습9편|바람은 부는 것으로 이미 바람

부제_‘안 됨’을 계속 쌓아가기

 

영화 <여인의 향기>에는 시력을 잃은 퇴역한 장교 프랭크 중령이 낯선 여인과 탱고를 추는 장면이 나온다. 프랭크는 앞이 보이지 않지만, 한 번도 탱고를 춰본 적 없는 여인을 리드하며 말한다. “스텝이 꼬이면 그게 탱고요.” 탱고에는 정해진 스텝이 없고, 꼬이면 꼬이는 대로 흘러가는 것. 그 자체가 탱고라는 말일 것이다.


여행이란 비행기나 기차, 자동차에 오르기 전부터 어딘가로 떠날 생각을 품고 그곳의 날씨며 풍경이며 음식을 검색해보고 일정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이동하는 과정 모두를 포함한다. 여행지로 향하는 길에서 겪는 시행착오나 계획의 어그러짐도 여행이며 꼭 목적지에 당도해야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는 건 아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여행의 여운은 이어지며 어쩌면 평생이 이전 여행의 연장선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곳을 여행하고 왔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그 도시의 전부를 속속들이 다녀온 것은 아니다. 설령 그 도시의 주민이라 할지라도 그 도시의 전부를 알지 못한다. 나 역시 서울에 살고 있지만 그중에서 내가 알고 있는 지역은 아주 한정돼 있다. 그런데도 외국인이 서울에 대해 물으면 마치 서울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처럼 행세한다. 때로는 서울에 대해 책을 읽은 외국인이 나보다 더 정확하게 총체적으로 서울을 경험한다.(...)

여행의 경험은 켜켜이 쌓여 일종의 숙성과정을 거치며 발효한다. 한 층에 간접경험을 쌓고 그 위에 직접경험을 얹고 그 위에 다시 다른 누군가의 간접경험을 추가한다. 내가 직접 경험한 여행에 비여행, 탈여행이 모두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여행 경험이 완성되는 것이다.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 더 명료해진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


물론 요가 수련도 마찬가지다.

 

피하고 싶거나 지레 포기하고 싶어지는 상황을 만날 때, 그런 상황 역시 실은 내가 불러온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냐고 선생님은 물으셨다. 그런 부담은 내가 고통스럽고 상처 받을까 봐 미리 반격하고 저항하는 마음이다. 저항하는 마음에 짓눌려 포기하고 피하면, 피하고 싶은 일은 살아가면서 계속 반복될 것이다. 하지만 저항심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면 더 이상 피하고 싶은 상황은 오지 않을 거라고 하셨다.

 

이번엔 이런 동작이 있었다. (비보잉을 해야 할 것 같은) 날아오르려는 까마귀 자세.

에카 파다 바카사나

 



 

플랭크업 자세에서 한쪽씩 무릎을 양 팔꿈치에 붙이는 동작인데, 상체의 무게중심이 팔에서 좀 더 앞으로 쑥 나온 상태에서 진행된다. 마치 까마귀의 다리 역할을 하듯 팔을 거의 몸의 중심에 붙이고 코어 힘과 엉덩이, 허리, 허벅지 힘으로 힘의 균형을 잡고 다리를 들어올린다. 나의 경우, 허리, 엉덩이, 허벅지가 슈크림의 부드러움을 겸비하고 있었기에 자꾸 팔에만 힘이 들어가고, 팔에도 힘이 충분치 않았으므로 다리를 도무지 들 수 없었다. 다리를 들기 전부터 앞으로 고꾸라질 것이 예상됐다. 준비자세만으로 팔이 후들거릴 각이 나왔다고 할까. 우습게도, 예상 가능하니까 시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업 특성상, 한 가지 자세를 꽤 긴 시간(한정된 수업시간 중 15분에서 30분가량)을 두고 여러 번 시도하고 실패하고 시도하고 깊어지기를 반복했기에 안 될 것 같다고 우두커니 있을 순 없었다. 선생님은 수련 중간 중간 계속 조언하셨다. 피하고 싶고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내가 만들어내는 저항심이라고.

그 말을 들으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이 동작을 지금 여기서 피한다고 영영 작별일까. 수련을 계속할 생각이면 피하고 싶은 동작은 아침 공복처럼 다시 돌아온다. 절대 끝나지 않는다. 저항심의 뫼비우스.

 

『아무튼, 요가』를 쓴 박상아 저자는 뉴욕에서 우연히 요가를 만나 거의 중독 수준으로 각종 요가 수련을 거듭한 후 어느 날, 명상 중에 몸이 떨리는 쿤달리니 에너지를 경험한다.

 

"크리야(Kriya)란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쿤달리니(Kundalini)라 불리는 척추 에너지를 깨우는 수련으로 이 에너지가 깨어나면 전에 없던 지혜와 통찰력, 그리고 창조성 등이 생긴다.(...)

쿤달리니 에너지를 깨우는 크리야 수련은 뇌와 척추 신경을 자극하는 위험한 수련이기 때문에 반드시 경험이 있는 선생님과 함께 수련해야 한다. 내가 크리야 수련으로 쿤달리니 에너지를 경험했을 때는 빈야사 수련을 비롯해서 다른 수련들도 강도 높게 하고 있어서 척추 에너지를 수련에 적극 활용할 수 있었지만 신체적으로 준비가 안 된 이가 그런 단계를 겪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지금은 돌아가신 요기 바잔이 살아생전에 말씀하셨다. "쿤달리니 요가는 스승에 대한 사랑 없이는 절대 깨달을 수 없다." 재러드에 대한 무한 신뢰가 의심과 방어벽을 완전히 허물고 내 안에 잠재된 무한 에너지를 깨우게 한 것이다."


이 지경에 도달하기 위해서 박상아 필자가 얼마나 무수한 시간을 요가 수련에 몰입했는지 책을 통해 충분히 전달됐기에 그 견고한 밑바탕 위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스승에 대한 무한 신뢰와 사랑.

 

필자가 스승을 무한 신뢰한 것 같은 믿음까지 도달하지는 못할지라도, 나도 선생님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흠모했기 때문에 '사랑 없이는 절대 깨달을 수 없다'는 그 말을 떠올리며 선생님의 말을 믿고 따르려고 했다.

 

되든 안 되든 그냥 하자. 되는 대로 걍 해보자, 그렇게 마음을 달리 먹었다. 그러고서 자세를 취하려고 시도하니 어김없이 앞으로 고꾸라져서 떡메에 눌린 떡처럼 얼굴이 납작 뭉개졌다. 예상대로였다. 예상대로의 ‘안 됨’을 어정쩡하게 계속 시도한다는 게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다소 허무하고 막막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팔, 복부, 허벅지에 힘을 주며 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시도할 때마다 팔은 버티지 못했고 상체는 무너졌으며 허리 밑으로는 아예 힘을 쓰지도 못했다. 결국 얼굴과 이마로만 버티다가 엎어졌다.

 

나중에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방향성을 갖고 그곳으로 가려고 ‘안 됨’을 계속 시도하다 보면 결국 거기에 닿는 힘이 생긴다고.

안 되는 걸 계속 시도하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 과정이 수련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목표 자세에 가닿으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는데, 그 고군분투 속에서 힘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길로 가는 중이며, ‘가는 길’이 이미 요가임을 상기해야 한다. 완성된 동작이 전부가 아닌 것.

 

“동작이 어렵게 느껴질 때는 자동반사적인 목소리에 굴복해 그만두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 쉽다. 그대로 멈추고 흐름을 완전히 이탈하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한다. 두려움이 우리를 지배하면서 그만 포기하라고 속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때라도 완전히 흐름에서 빠져나오는 대신 단 20퍼센트라도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서 흐름을 유지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수련이 현실, 환상, 두려움 중 무엇에 영향을 받는지 보는 것이다.

20퍼센트가 그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면 온 마음을 다해 그만큼만 해도 된다. 여기서 수련은 흐름을 유지함과 동시에 자신의 신체 능력을 존중하는 것이다. 몸을 돌보기 위해 동작을 멈춘다면 그런 사실에 대하여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이다.(...)

내면의 진실, 즉 더 큰 목적에 충실히 살아가면 매 순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아차리게 된다. 물방울이어도, 시냇물이어도, 굽이치는 강이어도 좋다. 흐름 안에 있다면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 배런 뱁티스트 『나는 왜 요가를 하는가』 중

 

애초에 ‘완성된 동작’이라는 게 있을까. 고난도의 자세를 해냈다고 하더라도 어떤 마음으로 그 자세 안에서 머무느냐, 얼마나 머물 수 있느냐가 또 남아있다. 어떤 여행지에 한 번 다녀왔다고 해서 그곳의 전부를 안다고 말할 수 없듯, 한 번 아사나를 완수해냈다고 해서 영원히 그 자세를 같은 마음으로 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언제든 흐트러질 수 있으며 삶의 시간이 쌓일수록 어떤 자세는 매번 다르게 해석되고 깊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건 완성이 아닌 방향성.

지금 번듯한 동작을 해내지 못한다 해도 절실히 그곳에 닿고자 수련하는 과정 안에 있다면 이미 '한 순간의 완성' 안에 머문 것이 아닐까. '순간의 완성'이 점점이 모여 '완성의 완성'에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

 

때때로 믿을 수 없겠지만 좋아하는 일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 믿음은 담날부터 팔에 알이 배는 것으로부터 채워진다. 단 1g의 힘이나마 쌓아갈 수 있다면.





 

     ABOUT AUTHOR

     여름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어슬렁거리며 방황하는 존재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흔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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