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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좋아하는 작품들과 이야기들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매주 마인드풀에 관한 다채로운 정보와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작가가 되고 싶은 분들은 오른쪽 상단의 '호스트 시작하기'를 참조해주세요. 


설익은 마음에게 한 입14. 알아주는 이 없어도 - 비빔밥


제주의 어느 작은 찻집에서

땡볕에 한라수목원을 세 시간쯤 돌고는 벌겋게 익은 얼굴로 찻집 앞에 섰다. 찾았다! 통유리로 되어있는 한쪽 벽면에 드리운 하얀 커튼이 필요한 만큼만 남기고 햇살을 곱게 걸러, 꼭 알맞은 양과 질감의 햇살이 실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테이블마다 수줍은 미소를 띤 커플이 마주 보고 앉아있었고, 단정하고 편안한 옷차림에 혼자 책을 보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이 고즈넉한 평화를, 이 공간을 부유하는 공기 속에 스민 아름다움을 내가 훼방 놓는 건 아닌가 싶어 찻집에 들어서려는 발걸음에 잠깐 버퍼링이 걸렸다. 등산 후에 들를 곳은 여기가 아니라 막걸리집이 어울리겠지만, 나도 샤랄라한 원피스에 구두를 신었으면 좋았겠지만 할 일이 있었다. 들어서기 전 흙 묻은 운동화를 털었다. 여길 오기 위해 제주도를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인스타그램 피드로만 흘긋흘긋 훔쳐보던 아름다운 공간 속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맛보고 싶었다.

잠시 뒤, 사장님이 웃으며 가져다준 음료와 양갱을 보고 감탄했고, 맛을 보고 나서는 통탄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맛과 분위기를 동시에 잡긴 상당히 힘들지 않은가. 분위기 근사한 곳에서 분위기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내놓는 경우가 드물다. 예쁜 카페 가서 맛없고 비싼 음료를 마시면 장소 값이라고 퉁치게 되지 않나.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에이, 맛있으면 됐지 뭐."하고 공간의 척박함이나 서비스의 불친절함을 애써 웃어넘긴다. 사람으로 치면 옷도 잘 입고 풍기는 분위기도 근사한 사람이, 말도 잘 통하고 취향도 비슷한 경우랄까. 딱 적당한 밸런스가 갖춰진 사장님의 감각에 홀딱 반해, 그녀의 강의를 못 듣는다는 게 한층 더 서럽게 느껴졌다. 이 슬픔을 맛으로 보상받아야겠다는 마음에 아까 망설였던 다른 메뉴도 시키고, 제주의 작은 책방에서 산 책을 꺼내 공간과 시간의 넉넉함을 누렸다.


꽤 오래 앉아있었는지 창으로 들이치던 햇살도 어느새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손님들도 하나둘씩 빠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여유가 좀 생긴 사장님이 내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와 의자를 하나 당겨 앉았다.햇살이 사라진 자리를 자연스레 이야기가 차지했고, 우리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부드럽게 흘러나갔다. 찻집을 열었지만 사람을 상대하기 너무 부끄러워서 늘 구석에 숨어있었다는 이야기, 제주의 습도는 육지와 다르기 때문에 레시피를 전면 수정했던 고충에 대한 이야기, 인테리어를 사장님과 딸이 손수 했기 때문에 잘 뜯어보면 어설픈 곳이 많다는 이야기, 글로는 전할 수 없는 그녀 개인의 이야기도. 견과는 오븐에 구우면 특유의 냄새가 남아있어 일일이 팬에 볶아서 쓴다는 말을 들었을 땐 박수를 치며 공감했다. 해본 사람만이 알기 때문이다.


카페 마감시간을 훌쩍 넘겨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발걸음을 쉽게 옮기지 못하고 입구에 서서 또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사장님이 "우연히 시작한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그러니 지금 하고 있는 일  열심히 하세요. 우리 인생이 어떻게 될지 진짜 몰라요."하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사장님 손을 꼭 잡으면서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제 책 나오면 선물로 드릴게요."하고 얘기했다. 내 손을 감싼 그녀의 손이 따뜻했다. 내 뒷모습에 대고 오래오래 손을 흔드는 그녀를 보면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외로울 땐 비빔밥

요리 중에 남들이 그 수고를 알아주기 힘든 대표적인 메뉴가 있다. 바로 비빔밥이다. 눈으로 보기엔 재료도 소박하고 준비도 어려워 보이지 않지만, 제대로 만들려면 갖은 정성이 다 들어간다. 나물은 각기 가진 고유의 색과 향이 섞이지 않도록 따로 데친 뒤 물기를 한번 짜고, 다시 나물마다 어울리는 각각의 양념을 만들어 조물조물 무친다. 당근과 표고버섯은 밥과 함께 비볐을 때 겉돌지 않도록 얇게 채 썰어 볶는다. 준비된 각각의 재료는 한 그릇에 색이 고루 담기도록 밥 위에 가지런히 얹고, 소금 간을 하지 않고 살짝 구운 김은 다른 재료와 어울리는 크기로 가위로 곱게 잘라 더한다. 마지막으로 향긋한 고추장 양념을 만들어 곁들이면 완성이다.


눈을 즐겁게 하는 조화로움도 잠시, 젓가락질 몇 번에 비빔밥은 말 그대로 비벼진다. 먹는 건 쓱-이다. 굳이 재료 손질에 이 많은 수고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순식간이라서 허무한 마음도 든다. 나물이 다 같은 나물이지 일일이 따로 데치는 것도 모자라 양념까지 따로 만들 필요가 있나 싶지만, 재료 손질에 얼마나 정성을 들였느냐에 따라 느껴지는 맛의 깊이가 완전히 다르다. 그 맛을 알고 나면 비빔밥을 만들 때마다 수고로움을 감내할 수밖에.


"네가 그런다고 알아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

웹툰 <치즈 인 더 트랩>에서 유정이 홍설에게 했던 말이다. 이 말이 어찌나 외롭게 느껴지던지, 대체 알아주는 게 뭔가 싶어 사전을 찾아봤다.

알아주다 [동사]

1. 남의 사정을 이해하다.

2. 남의 장점을 인정하거나 좋게 평가하여 주다.

3. 어떤 사람의 특이한 성격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다.


나를 알아주는 행위의 주체는 내가 아닌 남이다. 내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애쓴 만큼 좋은 결과를 보장받을 수 없다. 내친김에 외롭다는 말도 사전을 찾아 확인했다.

외롭다 [형용사]

1. 홀로 되거나 의지할 곳이 없어 쓸쓸하다.

'알아주다'에는 남들이 가득했는데 '외롭다'에는 나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그 말이 외롭게 느껴진 이유는 당연한 거였다. 거기엔 나 빼고 아무도 없었다.


뭔가를 써보려고 오래된 노트북을 켜고는, 제주도의 그 찻집을 종종 생각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정성스럽게 하는 그 사람을 떠올린다. 레시피를 전면 수정하든, 제주 유자를 가지고 끙끙거리든, 견과를 오븐에 굽든 팬에 일일이 볶든, 쌀알에 습기가 많든 안 많든 그걸 누가 알아줄까. 그 차이를, 그 정성을 알아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저 찻집은 SNS에 올릴 사진이나 이쁘게 나오면 그만이지. 나도 그렇지 뭐. 회사 다니면서 돈이나 벌지, 뭘 쓰겠다고 매일 그렇게 끙끙거리는지. 써 놓은 글을 왜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 수정하는지, 다른 표현은 없는지 왜 그렇게 고민하고 사전을 뒤적이는지. 남들은 참 즐겁게 쓰는 것 같은데, 어떤 작가가 '글 쓰면서 참 행복했다'라고 고백한 서문도 읽었는데, 난 이렇게 끙끙대는 것 자체가 즐겁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런데도 계속하고 있는 나를 나도 모르겠고.


"모든 일이 남한테 잘 보이려고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유정의 말에 홍설이 한 대답이다. 그래, 똑똑한 설이 말이 맞겠지.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어서 외롭다면 외로울 줄도 알아야지. 외로운 날에는 비빔밥을 해 먹어야지. 그래도 견딜 수 없이 외로울 때면 제주의 그 찻집에 가야지.


(+) 그리고 오늘, 나의 첫 책이 나왔다. 


 

     ABOUT AUTHOR

     꽃반지


     글로 마음을, 요리로 몸을 돌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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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12:30 -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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