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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익은 마음에게 한 입13. 판타지는 녹을지라도 - 팥빙수


슬기로운 정주행 생활  

주말 이틀 동안 <슬기로운 의사생활> 정주행을 거의 마쳤다. 총 12회로 한 회에 90분가량의 길이인데, 주말 내내 11화를 다 보고 이제 딱 한 화를 남겨두고 있으니 어디 보자... 17시간 동안 누워서 드라마를 본 셈이다(이 글을 쓰고 마지막 화를 보고 잘 생각이다). 신원호 피디가 "시청자들이 '나도 저런 사람들과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세상 어디에 저런 사람들이 있나 싶을 만큼 선하고 다정하고 매력적인 동기 의사 다섯 명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초 단위로 사람이 살고 죽는 각박한 병동을 배경으로 사람 냄새 풀풀 나는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툭하면 눈물이 났다. 17시간 내내 울다 웃다 했다.


그 많은 환자들의 이름과 사정을 일일이 기억하고 챙기는 것, 5월 5일에 죽게 된 어린이를 위해 10분을 미뤄 5월 6일에 수술을 하는 것, 맛있는 걸 먹을 때마다 어김없이 부를 이름이 있다는 것, 자기의 아픈 상처를 꺼내 보이며 타인의 상처를 보듬는 것, 말없이 돕는 것, 친구와 오랜 우정을 유지하는 것, 마음을 숨기지 않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는 빠듯한 하루하루를 살면서도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을 놓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감동을 너머 판타지처럼 여겨질 정도다. 몇 번 마주친 이의 이름과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정확히는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고), 버스를 느리게 타는 사람 뒤에 서면 이미 몸에 밴 조급함 탓에 짜증이 나고, 밥 먹자고 연락 한번 해볼까 싶다가도 관두게 되고, 내 마음을 상대에게 드러내기보다는 나조차 모르게 닫아버린다.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기가, 누군가를 위해 10분을 내기가, 누군가에게 무심히 연락해 밥 먹자는 말 한번 꺼내기가 참 별스럽고 유난한 일이 되어버렸으니.


해마다 정주행 할 준비가 됐어요 

계획에도 없던 드라마를 보느라 이번 주말을 몽땅 써버렸지만, 주말을 비워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마감도 끝났겠다, 좋아하는 카페에서 지난주부터 빙수도 시작했겠다, 구석 자리에 앉아 빙수 한 그릇을 시켜놓고 새로 산 책을 보든 멍하니 앉아있든 할 생각이었다. 그곳의 빙수 메뉴는 딱 하나. 딸기빙수도 녹차빙수도 우유빙수도 없다. 서걱서걱 간 얼음 위에, 견과류와 흑임자가루와 직접 삶은 팥을 듬뿍 올려 마무리한 정직한 빙수다. 맨 위의 팥알부터 살금살금 파먹다가 얼음이 슬쩍 녹기 시작하면 숟가락으로 마구 비벼주는 거지. 특별한 맛은 아니지만 한 그릇 다 먹고 나면 든든하게 배가 부를 정도라 해마다 개시를 기다리게 된다. 날씨가 슬슬 달아오른다 싶으면 뻔질나게 "사장님, 빙수 언제부터 하세요!"를 외치는 나.  


이어질 이야기가 궁금해 중간에 끊을 수가 없고, 빙수는 먹고 싶고. 겨우겨우 나갈 채비는 했는데 결국 드라마를 보느라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갔다. 처음엔 주인공 다섯 명에게만 시선이 갔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드러나는 조연들의 이야기도 너무 따뜻하고 좋았다. 누구 하나 빼놓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서로 부대끼면서 변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마치 빙수 한 그릇을 먹는 기분이 들었달까. 얼음, 미숫가루, 견과류, 연유, 팥을 따로 먹으면 그냥 그러려니 할 텐데 숟가락으로 석석 비비기 시작하면, 1년 내내 손꼽아 기다리는 근사한 맛이 탄생하는 것처럼.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빙수를 먹었을까. 혼자 먹을 때도 있었고, 누군가와 함께 먹을 때도 있었다. 그 어떤 빙수든 맛있었다. 얼음을 갈았든 우유를 갈았든, 팥이 올라갔든 팥 대신 녹차 시럽이 듬뿍 올라갔든 그 뭐든지. 빙수는 금세 녹아 없어졌지만, 빙수를 서걱서걱 비비면서, 빙수를 떠먹으며 나눴던 이야기와 바라본 풍경들은 여름이 끝나도 내 안에 남아 마음이 견딜 수 없이 더운 삶의 어떤 날들을 잘 이길 수 있게 해 줬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판타지라고 느낀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 저런 사람 어딨느냐'는 말을 많이 한다고 한다. 그 말이 맞다. 현실에 저런 사람 없을 수도 있다. 맞긴 맞는데 없으면 좀 어때, 금방 녹아 사라지면 어때. 아무도 금방 녹는 빙수를 탓하지 않는 것처럼, 금방 녹아 사라질 판타지라도 그 순간이 행복하면 되는 걸. 빙수를 먹다 보면 더운 여름이 어느새 훌쩍 가버리는 것처럼, 가슴 한편이 몽글몽글해지는 좋은 사람들을 드라마에서라도 많이 만나고 싶다. 올여름엔 미뤄둔 드라마나 실컷 볼까 보다. 물론 빙수를 퍼먹으면서. 아, 행복한 빙수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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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반지


     글로 마음을, 요리로 몸을 돌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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