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A

우리가 좋아하는 작품들과 이야기들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매주 마인드풀에 관한 다채로운 정보와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작가가 되고 싶은 분들은 오른쪽 상단의 '호스트 시작하기'를 참조해주세요. 


설익은 마음에게 한 입09. 눈에 좋고, 코에 좋고, 귀에 좋아요 - 용과

                                                         



어디에 쓰셨어요?

지난주부터 전 국민을 대상으로 지급된 '긴급재난지원금'의 사용처가 저마다 재미있다. 미뤘던 파마를 한 사람, 밤마다 족발이며 치킨을 배달시켜먹느라 금세 삼 킬로가 찐 사람, 세계여행을 계획하며 텐트를 산 사람, 본인 몫의 지원금을 세대주에게 요구했다가 괘씸죄로 되려 생활비를 매달 뱉어내게 된 웃기고 짠한 이야기까지. 1인 가구 세대주인 나도 긴급재난지원금 덕분에 고민하던 그림 수업을 계속 들을 수 있게 됐다. 나머지 금액은 알뜰하게 써야지 했는데, 버스 기다리며 잠깐 들른 액세서리샵을 구경만 한다는 것이 정신을 차려보니 목에 뭐 하나를 달고 나왔더라.


파마, 한밤의 배달음식, 텐트, 그림 수업과 목걸이... 그다지 급하지도 않고, 굳이 없어도 되는 것들에 돈을 썼구나 싶다가, 정말 이것들이 급하지도 않고 쓸모없는 것들인가 곰곰 고민해봤다. 오랜만에 누군가의 손가락에 머리를 맡기는 안온한 기분, 깊어가는 여름밤에 맵고 뜨뜻한 걸 먹으며 온몸에 더해지는 두툼한 만족감(+뱃살), 집안에 텐트를 쳐놓고 쏙 들어가 앞으로의 여행을 그려보는 두근두근한 마음, 연필을 들고서 무언가를 그려내는 침묵의 시간,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릴 때 손끝에 닿는 매끄러운 감촉. 이 모든 게 정말 급하지도 않고 없어도 되는 것들인 걸까. 혼자서 '아니요'라고 작게 말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장면에 쿠션을 끼워 넣는 이런 순간들이 있어야, 팍팍한 일상이 나와 꽉 맞물릴 때도 다치지 않을 테니까. 긴급재난지원금이 서둘러 향한 곳은 미루고 미루다가 하지 못했던, 끝끝내 망설이던, 평소였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들. 꿈에도 몰랐지만 이런 것들이야 말로 사실 우리에게 정말 급하고, 꼭 필요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긴급재난지원금이 이름에 맞게 잘 쓰였구나 싶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왜 가끔은 평소에 잘 먹지 않거나, 가격이 비싸 망설이게 된다거나, 생김새나 냄새 때문에 먹어보지 않은 것을 덥석 사게 되지 않나. 내겐 용과(Dragon fruit)가 꼭 그렇다. 가격도 꽤 나가는 수입과일인 데다, 별다른 맛이 있는 것도 아니라 굳이 찾아 먹을 이유가 없는데도 불현듯 용과가 무척 먹고 싶은 때가 있다. 시뻘건 붉은색에 표면에 울퉁불퉁 솟은 뿔을 보고 있으면 정말로 이놈의 이름은 '용과'가 아니면 뭘까 싶게 용과처럼 생겼다. 반으로 딱 갈랐을 때 아기용이 불을 뿜으며 튀어나온대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다 이유가 있어요

용과를 처음 알게 된 건 중국 유학 때다. 워낙 요상하고 신기한 게 많은 중국이라 웬만한 건 눈도 깜짝 안 하게 됐을 때, 마트에서 용과를 봤다. 뭐야 이건. 호기심에 하나를 사 와서는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칼을 들고 반을 딱 갈랐는데, 막상 속은 두부처럼 뽀얗고 말캉했다. 머리는 시뻘겋게 염색하고 오토바이 몰고 다녀서 엄청 세 보였는데, 알고 보니 지는 잎새에 눈물짓는 순둥이 친구 같았달까. 옅은 단맛이 혀를 스쳐 목으로 꿀꺽 넘어갈 뿐, 이렇다 할 향도 맛도 없는 녀석인데도 용과를 좋아했다. 용과를 하나 꺼내먹으며 시작하는 이국에서의 아침이, 왠지 이국을 더 이국답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용과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외국이니까 이건 여기에서만 볼 수 있는 거고, 지금의 나도 여기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거야.' 

그러니 나는 이 상황을 버텨내자. 꽤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의 내 우울은 주먹만 한 용과를 훌쩍 삼킬 만큼 크고 단단해, 용과 하나로 외롭고 고단한 마음을 버틸 길이 없었지만 용과를 참 많이도 먹었다. 


며칠 전, 오랜만에 용과를 샀다. 반으로 툭 갈라서 씨가 촘촘히 박힌 말캉한 과육에 숟가락을 푹 밀어 넣고는 한 숟갈 한 숟갈 천천히 떠먹는다. 내 몸이 용과를 먹으며 버티던 그때를 기억해내고는, 용과가 필요하다고 긴박한 신호를 보내는 건 아닐까. 지금의 나는 뭔가를 버티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용과야 말로 지금 내게 제일 급하고 꼭 필요한 것일 수도 있겠다.


가끔은 평소에 해보지 않고, 받아보지 않았던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면서 나를 무한히 넓혀보기도 하고 좁혀보기도 하는 게 좋다. 어디에 좋으냐고 묻는다면 눈에 좋고, 코에 좋고, 귀에 좋다. 왜 좋으냐고 묻는다면 그럴 때 우리는 못 보던 걸 보고, 맡지 못하던 냄새를 맡고, 듣지 못하던 걸 듣는다.

김현,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


가끔 평소에 사지 않던 것, 먹지 않던 것들을 자신에게 던져보자. 어디에 좋으냐고 물으면 눈에 좋고, 코에 좋고, 귀에 좋다. 비로소 못 보던 걸 보고, 맡지 못하던 냄새를 맡고, 듣지 못하던 걸 들으면서 내가 무한히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한다. 그렇게 몸과 마음의 긴급재난 상태에서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빠져나오게 되는 걸지도.


용과를 먹을 때면, 세상에서 가장 작게 움츠러들던 내가 있고 그런 나를 덤덤하게 바라보면서 의연하게 뭔가를 버텨내는 넓은 내가 다 있다.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눈과 코와 귀가 더 좋아졌구나. 마음이 더 좋아졌구나. 옅은 단맛이 혀를 스쳐 목으로 꿀꺽 넘어간다.




 

     ABOUT AUTHOR

     꽃반지


     글로 마음을, 요리로 몸을 돌보는 사람

      작가 호스트 소개 바로가기

    



점심시간 12:30 - 14:00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뉴스레터 발송을 위한 최소한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용합니다.
수집된 정보는 발송 외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며, 서비스가 종료되거나 구독을 해지할 경우 즉시 파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