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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익은 마음에게 한 입08. 사랑도 미움도 프리스타일 - 도시락


"매일 도시락 싸는 거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전 회사 옆자리 동료가 오랜만에 안부를 전하며 한 말이다. 그냥 흘릴 수도 있었는데, 마침 사촌동생도 그즈음 해서 "누난 진짜 성실한 거지. 아침마다 도시락 싸잖아."라는 메시지를 보내온 참이라 '도시락이 그렇게 대단해 보였나?'라는 물음표를 잠시 날려봤다. 하긴, 내 도시락을 보며 꽤 오랫동안 당연히 엄마가 싸주는 걸로 알고 있던 직장 동료들도 여럿 있었으니.


엄마표 아니에요

매일 아침, 동거인(?) 넷과 분주하게 아침을 시작한다. 밥솥, 찜기, 냄비, 믹서기. 일단 하루 전날 불려놓은 쌀로 밥을 짓고(현미로 지을 경우엔 시간이 좀 걸린다), 찜기에는 고구마나 단호박을, 냄비에는 그날그날 다르지만 요즘은 토마토, 가지, 양파, 파프리카 따위를 넣고 뭉근히 조린다. 두부와 풋고추를 송송 썰어 넣은 된장국을 끓일 때도 있다. 그 사이 믹서기에는 바나나를 기본으로 야채와 과일을 넣고 주스 두병을 준비한다(텐션이 높은 날엔 세 병정도). 웬만하면 설거지도 다 한다. 퇴근해서 개수대 가득 쌓인 설거지를 보면 그냥 집을 통째로 내다 버리고 싶어 지니까.

이게 다가 아니지. 머리 감고, 세수도 하고, 옷도 입고, 화장도 해야 하는데 도시락에 거의 시간과 정성을 90% 이상 할애하게 되니 간신히 씻고, 옷과 화장은 거의 포기했다.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나를 못 알아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집히는 대로 아무거나 입다 보니 스타일이 천차만별이라서 그렇다. 샤랄라 원피스 파인 줄 알았는데, 그다음 날은 춤추는 오빠처럼 헐렁한 바지를 끌고 나타난다거나, 그다음 날은 셔츠에 정장 핏이고. 게다가 뭘 입든 커다란 도시락 가방을 들고 있으면 스타일은 내다 버린 거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만큼 나에겐 도시락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내가 애지중지 도시락 파였던 건 아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겪는 몸 망치기 퀘스트를 성실히 수행했다. 아침이면 빵 한 쪼가리를 입에 문채 허겁지겁 버스를 타고, 점심이면 간단하게 중식을 시켜먹거나 업무 스트레스를 잠깐이라도 잊을 수 있는 자극적인 맛을 찾아다녔다. 아침은 바빠 거르고, 출근하는 평일 점심은 한 끼 사 먹는다 쳐도 저녁은 어찌할 건가. 바쁘면 피곤하고, 피곤하면 밥 차릴 여력이 없고, 밥 차릴 여력이 없으면 보통 시켜먹거나 굶게 된다.

집에 오면 이불로 쏙 들어가는 성격이라 저녁이고 뭐고 귀찮았던 나는, 나름의 지혜(?)를 발휘해 고구마 말랭이 80 봉지를 샀다. 고구마 말랭이는 인스턴트도 아니고, 별다른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으니 괜찮겠지. 게다가 고구마는 다이어트 식으로 많이 먹으니까. 물론 한 끼를 고구마 말랭이 한 봉지로 대체하면 괜찮았겠지. 문제는 누워서 예닐곱 봉지를 먹었다는 게 있다. 두 달이 안 지나 10킬로 가까이 찌는 바람에(매일 밤마다 고구마 예닐곱 개를 먹은 셈이니), 흡연자들이 담배 끊는 심정으로 고구마 말랭이를 겨우 끊었다.

그즈음 해서 '뇌는 요리과정부터 식사로 인지한다'라는 정보가 내 귓가를 슬쩍 스쳤다. 가끔 내 손으로 주스라도 갈아 마신 아침이면 그렇게나 기분이 좋더라니, 내가 나를 위해 뭔가를 마련한다는 사실을 뇌가 인지한 걸까? 기분 탓인지 주스를 마신 날이면 허기가 덜했다. 재료 조합에 실패해 결국 못 먹고 버리는 날도 종종 있었지만, 나만의 독창적인 레시피로 만든 주스는 빛깔도 맛도 꽤 근사했다. 한 병이 두병이 되고, 두병이 세병이 됐다. 마시기만 하니까 좀 씹고 싶고, 그러다 보니 찜기도 냄비도 밥솥도 총출동하는 아침이 돼버린 거다.


내 방식대로 사랑할래요

아침마다 동동거리면서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아침은 이런 게 아니라고.'아침에 일어나 명상하기'가 5년째 새해 목표 리스트의 맨 처음을 장식하고 있잖은가. 매일의 맨 처음은 고요와 여유로 시작하고 싶었다. 다친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살뜰하게 도닥여주고 싶었다. 도시락을 준비할 때면 늘 '더 중요한 것'을 미루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핑계만 대고 마음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구나.

퇴근 후, 집으로 가는 어느 저녁이었다. 발걸음마다 덜그럭 덜그럭 빈 도시락통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날은 하루 종일 나를 몹시도 미워하는 중이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왜 나를 미워하는 건 이렇게 아무 때고 하면서, 사랑하는 건 꼭 시간 내서 이른 아침에 가부좌 틀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미워하는 게 이렇게 자유로우면(?) 사랑하는 것도 아무 때고 아무렇게나 할 수 있잖아.'

손에 쥔 도시락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도 사랑이잖아. 이게 내 방식이잖아.'

나를 사랑하는 행위는 '명상'이라고 틀을 만들어놓고는, 지키지 못했고 지킬 수도 없으며 지키지 못할걸 알면서도 아침마다 끊임없이 나를 자책하다니. 나를 미워하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다 싶었다. 그 뒤로는 도시락을 쌀 때마다 이 시간에 명상을 해야 한다는 죄책감이 사라졌다. 나는 내 방식대로 나를 돌보고 있었으니까.  

매일 아침마다 도시락을 꼬박꼬박 싼다고 해서, 내 마음이 더 둥글어지거나 너그러워지는 것 같진 않다. 명상하기 싫은 좋은 핑곗거리를 찾아낸 걸 수도 있다. 성질 끝까지 뻗치는 날에는 내가 내 마음과 서로 머리카락 쥐어뜯을 기세로 막 싸운다. 마음의 머리카락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못 움켜잡지만. 마음이 소리친다. 고정 레퍼토리가 있다.

"니가 나한테 해준 게 뭐냐. 난 이렇게 고생하는데, 넌 나를 돌보지도 않고 늘 뒷전이다..." 어쩌고 저쩌고. 그럼 나도 할 말이 있지.

"아침마다 도시락 싸는 게 보통 일이냐. 내가 왜 잠 줄여가면서 이 짓을 하는데. 그렇게 따지고 들 거면 내일부터 도시락 안 싸겠다. 씨유부터 세븐 일레븐까지 어디 그냥 편도(편의점 도시락)로 시원하게 달려보자."

그러면 그 시끄럽던 마음이 갑자기 뚝 고요해진다. 내 고생을 알기 때문이다. 분위기 봐서 슬쩍 멘트만 날려주면 나의 승리.

"이것도 다 사랑해서 하는 거야. 너도 알잖아. 앞으로 더 잘 돌볼게. "


물론 나도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하는 날이 많다. 며칠은 바깥 음식을 먹으며 신이 나는데, 일주일쯤 지나면 반찬이 부실해도 내가 싼 도시락이 먹고 싶다. 요리과정부터 식사로 인지하는 뇌처럼, 내 마음도 아는 거겠지. 매일마다 싸는 도시락이 사랑이라는 걸. 매일 아침 도시락을 싸면서 사랑을 저장한다. 그래야 내가 미운 날을 버틸 수 있으니까. 눈물 뚝뚝 흘리면서 집으로 가는 길이라도 한 손에는 언제나 빈 도시락 가방이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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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반지


     글로 마음을, 요리로 몸을 돌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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